월간 객석 auditorium 2002년 1월호에서 퍼옴

실크로드의 여행자 첼리스트 요요마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는 섞이는(Fuse) 것이 아니라, 만나는(Meet) 것입니다."


방랑자라 하여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요요마는 지금 세계지도를 새로 그리는 데 여념이 없다. 애팔래치아 산맥이며, 중국의 만리장성이며,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근본적인 태생을 그 이유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파리에서 보내고, 미국에서 음악 교육을 받은 그는 여느 동양인이 그러했듯, 파란 눈의, 혹은 까만 피부의 ‘나와 같은 미국인’들과 살면서 분명 자신의 정체성에 여러 차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의 방랑은 나이 스물에 연주 여행으로 시작됐다. 스무 살의 청년이 처음 본 이스탄불은 얼마나 경이로웠겠는가. 또 이탈리아는? 그리고 한국은? 그러나 나이 사십이 한참 넘은 요요마는 이제서야 실토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낯선 땅 위에서 홀로 외로움에 젖어 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요요마는 모든 땅에 속해 있는 코스모폴리탄이며 동시에 어느곳에도 속하지 않는 방랑자다. 그러나 방랑자라 하여 모두 길을 잃어 떠도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자신이 가야 할 곳과 떠나야 할 때를 아는 현명한 유랑도 있다. 지난 1999년부터 그는 ‘실크로드’를 따라 새로운 방랑길에 접어들었다(본지 2001년 10월호 기사 참조). 일본·중국·몽골·이란·터키·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21세기 실크로드 오디세이는 요요마에게 ‘잃어버린 나를 찾는 여행’이다. 그러나 그가 발굴해 내고, 또 새로이 만들어 내는 음악들은 역사라는 거대한 모래바람에 잊혀 버린 소중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하나였음’을.

2002년 3월 상하이 오케스트라와 내한.
그를 만난 지 너무 오래되었다. 한국을 다녀간 지가 벌써 햇수로 8년째. 그의 정다운 음악과 그의 새로운 모습을 동시에 갈망하던 한국 팬들을 위해 그와 인터뷰를 준비하던 중, 느지막이 한국 공연 일정이 확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오는 3월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그는 혈통적 동지인 상하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다. 드보르자크 협주곡은 그가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마찬가지로 두 번이나 음반으로 녹음했을 정도로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이 밖에도 상하이 오케스트라는 드보르자크의 ‘카니발’과 ‘신세계’ 교향곡 등을 연주하며 이날 콘서트를 드보르자크 스페셜로 꾸밀 전망이다.
인터뷰는 내한 일정이 확정되기 전에 이루어졌다. 대화는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8년여 동안 우리가 이별했던 시간의 음악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객석: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당신은 작곡가들에게 실크로드의 영역에 있는 독특한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유럽 악기와 전통 악기를 위한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이런 특별한 조건을 제시한 이유는?

요요마: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는 ‘섞이는 것(Fuse)’이 아니라 ‘만나는 것(Meet)’입니다.
새로운 위촉곡들의 리허설과 새로운 음들에 대해 배우는 동안 우리에게는 문화적인 작업 또한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단지 악보의 음표들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데 치중할 것이 아니라, 그 음들을 최대한 능동적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던 것이죠. 이런 문화들이 서로서로 어떻게 유기적으로 화합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

객석: 실크로드 프로젝트’라는 최초의 발상은 지난 1998년 당신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프로젝트를 구상하였는지요?
요요마:"실크로드’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리얼리티, 이 모든 것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98년에 이 발상을 구체화시키고자 첫 컨퍼런스를 가졌지요. 연주에 종사하는 사람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기에 참여했어요. 음악·음반 분야, 학술 분야, NGO 멤버들이 함께했지요. 한참 논의한 끝에 ‘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서로 다른 문화들 사이에 어떤 공통된 아이디어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모두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예술을 조명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지요.

객석: 한꺼번에 여러 가지 다른 문화와 전통을 구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요요마: 당시 컨퍼런스에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보다 곤란한 일들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과연 음악과 음악적 아이디어가 범세계적으로 돌고 돌았는가를 어떻게 연구할 수 있을까, 또한 전통적인 문화의 표현들을 어떻게 동시대 문화로 소생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객석: 본래 역사나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는가 봅니다.
요요마: 내 생각에, 내 삶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된 것 같습니다. 약 25년 전에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 배워 둔 교양 과목 커리큘럼들은 내 앞에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 주는 출발점이었죠. 여느 친구들처럼 음악 과목만 듣지 않고 인류학·역사학 등 다양하고 넓은 장르의 수업을 들으면서 지적인 자극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과 자료들을 모두 이때 습득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확실히 나는 교양 과목 커리큘럼이 낳은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교육으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얻었으니까요.

객석: 당신은 중국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서유럽에서 태어나 미국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중국의 온전한 전통문화를 접할 경험이 많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 중국의 전통 음악이라든가, 다른 나라의 전통 음악을 경험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그런 경험을 통해 전통 음악에 대한 개념이 바뀐 바가 있나요?
요요마: 중국 전통음악은 내게 낯선 장르가 아닙니다. 내 아버지는 중국 전통 음악에 아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분의 박사논문은 유럽 스타일의 음악 속에서 발견되는 중국 전통 음악 어법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전문가적 지식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중국의 전통 음악과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둘 다 직접 들으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이외 나라의 전통 음악들은 내가 온전한 직업 연주가가 된 뒤 연주 투어를 다니면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의 일인데, 아시아 투어를 다니면서 각 나라의 전통 음악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전통 악기와 연주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것이 나를 매료시켰습니다.

객석: 벌써 한국을 여러 차례 다녀갔는데요, 한국 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요요마: 여전히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몇 년 전 한국에 다녀왔을 때 사람들이 나한테 한국의 전통 음악이며 현대음악이 담긴 CD를 선물로 주었거든요. 그 음반들을 들으면서 나는 한국 전통 음악의 부활에 대해 적잖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번 두 번째 실크로드 리스닝 세션에서 몇몇 한국인 작곡가와 연주가들의 음악을 들어 보자고 제안이 들어왔을 때 아주 기뻐했지요.

객석: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곡가 강준일과 김지영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요요마: 그들의 작품을 지난여름에 처음 들었고, 듣자마자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한국의 전통 음악이 아직도, 게다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동시대적 스타일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객석: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궁극적 이상은 무엇입니까?
요요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음악적 전통에 먼저 놀랐고, 또한 동시에 서로 다른 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습니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러한 시도가 우리 모두로 하여금 낯선 문화들을 한꺼번에 포괄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를 바랍니다.
애팔래치아 음악을 통해 바흐의 음악을 깨닫다

객석: 최근 행보를 보면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탱고를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민속 음악을 녹음하는 듯한데요. 서구의 민속 음악도 과거에 연주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애팔래치아 산맥’이라든가, ‘애팔래치아 여행’ 음반에 녹음했던 그 음악들 말입니다.
요요마: 그 당시 베이스 주자 에드가 마이어, 피들(바이올린과 유사한 민속 현악기) 주자 마크 오코너 등과 함께했던 작업은 피들의 전통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를 통해 전통 음악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죠.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전해지는 음악들은 바로 그들, 마크와 에드가가 내게 소개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 음악들은 아일랜드·스코틀랜드·스칸디나비아의 전통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음반 작업은 나로 하여금 전통 음악이 어떻게 현대적인 스타일과 융합되어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는지, 그 과정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마치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처럼 말이지요.

객석: ‘애팔래치아 산맥’ 음악도 그랬지만, 당신은 음악적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참으로 오랫동안 일을 해 왔습니다. 이런 만남이 당신의 연주 스타일에 영향을 끼쳤는지요?
요요마: 물론입니다. 그들에게서 나는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마크 오코너라든가 에드가 마이어와의 만남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지요. 내가 그들에게 클래식 첼로 음악의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 것처럼, 그들 또한 나를 새로운 세계, 내가 연주하고 있는 클래식과는 전혀 다른 현악기의 전통을 내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알게 된 만큼 그대로 연주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죠. 첼로가 2천 석 혹은 3천 석의 객석이 마련된 커다란 콘서트홀까지 커버할 만큼 소리가 크고 기술적으로 까다로운 악기라는 데 있었습니다. 내가 과장을 섞어 가며 화려하게 연주를 할라치면 마크는 금세 제동을 걸었습니다. ‘안 돼, 그렇게 연주하면!’라고 말이죠. 색깔을 다채롭게 입히려고 해도 마찬가지였어요. ‘안 돼, 그 음악은 그렇게 연주하는 게 아냐. 조금 더 순수하게, 조금 더 기본적으로 연주를 하라고.’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때까지 나와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었던 좀 구닥다리 스타일의 인토네이션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큰 난관은 템포에 있었어요. 첼로는 다른 악기들이 제시하는 대화에 응답하도록 지시되었지만, 마크의 피들 연주는 스피드가 엄청났거든요. 하는 수 없이 나는 빠른 템포를 위해 활의 포지션을 바꾸는 법을 또 배워야 했지요. 이때의 ‘훈련’ 덕분에 나는 지금 무지 빠른 ‘텍사스 그루브’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당시 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에 적응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어요.

객석: 그런 스타일의 변화가 당신이 클래식을 연주할 때도 영향을 끼쳤나요?
요요마: 그렇죠. 새로운 방법으로 활을 잡으면서 나는 바흐를 보다 바로크적인 스타일로 연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바로크 악기에 대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고 싶어지더군요. 1500년대로 돌아가면 첼로는 그 시대 비올족 악기의 일원이었을 테고, 활을 잡는 방법이 아시아, 동유럽 지역의 현악기들과 아주 많이 비슷할 것이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마크와 에드가에게서 전수받은 가르침으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고, 또 톤 코프만·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와 함께 바흐·보케리니를 연주했습니다. 그 작업은 내가 마린 쿠르라는 몽골의 현악기를 연주하는 방법을 배운 것만큼 귀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객석: 지식이나 역사적인 사실에 있어서도 새로운 점을 발견했나요.
요요마: 마크와 에드가의 가르침은 ‘활질’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란 방법론의 차원을 떠나 있습니다. 이민과 종교 이동을 따라 음악이 어떻게 전달되어졌고, 또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그들은 내게 설명해 주었는데, 여기서 구전(口傳)이 얼마나 중요한 매개였는지 알게 되었죠. 예를 하나 들자면, 18세기와 19세기 앵글로 켈틱 땅으로부터 아메리카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은 그들의 지그와 릴과 혼파이프를 들고 왔습니다. 그 후손들은 이 악기들을 아주 다른 스타일과 레퍼토리로 계승시키고, 또 변화시켰죠. 또다른 예로 오늘날, 텍사스 전통 피들과 아일랜드 피들은 레퍼토리에 있어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가지 전통은 혈족이라는 관계를 증명하는 놓칠 수 없는 여러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음악이 어떤 경우에는 형태를 유지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모양새가 변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객석: 풍부한 상상력을 요구했던 ‘와호장룡’
이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의 사운드 트랙으로 지난해 그래미상을 수상했는데요.영화 사운드 트랙을 녹음할 때, 클래식을 연주할 때와 다른 점이 있었나요?
요요마: 일단 팀의 규모가 엄청납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사운드 트랙 녹음에 참여했어요. 또 다른 점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든 것을 반드시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대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아마도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있는 감독과 작곡가를 절대적으로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들과 직접 작업을 하면,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점들을 제외하고는 음악·이미지·영화의 중심 아이디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은 클래식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객석: 당신은 그렇다면 이안 감독, 작곡가 탄둔과 직접 작업을 했나요?
요요마: 그렇습니다. 그들 둘은 직접 나와 대화를 나누며 내가 영화에 온전하게 세팅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운 좋게도, 나는 탄둔과 탄둔의 음악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공허함 속에서 레코딩을 해야 했을 겁니다. 그의 멜로디 형태를 통해,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영화를 온전하게 보려면 상상력이 엄청난 도약을 시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러했듯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객석: 클래식 음반은 더 이상 녹음하지 않을 건가요?
요요마: 그럴 리가요. 가장 최근, 컴필레이션이긴 하지만 ‘클래식 요요’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실크로드를 진행하면서 클래식 연주 여행도 계속 다니고 있습니다. 다만 클래식과 클래식이 아닌 음악으로 이분법처럼 나누어 생각하는 건 불만입니다. 세상에는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고 훌륭한 음악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지요.

객석: 클래식·월드뮤직·재즈·크로스오버 등등 당신은 다양한 장르에 아주 많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 모든 당신의 연주를 통해서 듣는 이들이 무엇을 느끼길 바라는지요?
요요마: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선택은 개개인의 몫이니까요. 마치 내가 연주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어떤 이는 자유롭다며 좋아하지만, 또 다른 이는 너무 가볍다며 불만을 느끼듯이 말입니다. 다만 그 음악들이 거짓 없는 진정한 나의 모습인 것만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일 뿐입니다. 또한 진실은 결국 타인의 마음을 열어 주리라 믿습니다.
인터뷰 섭외·김수연 | 글·노승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