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이 글 중간에 좌파에 대한 의견도 잠깐 있답니다. 워크샵에 잠시 한국의 좌파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생각나서 올려놓습니다. ^^

시험 기간들이라 정신없으신 것 같은데, 머리 식힐 겸 해서 한번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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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그릇된 대외정책엔 국제연대로 맞서야"

[한국인터뷰] '행동하는 지식인' 노암 촘스키와…

노암 촘스키의 전기 ‘촘스키, 끝없는 도전’을 쓴 저자의 말을 빌리면 촘스키는 범인(凡人)의 기를 죽인다. 무엇보다 그는 무려 70여 권의 저서를 썼다.

언어학, 철학, 심리학, 교육학, 인지과학을 넘나들며 아우르는 통합적 학문 연구를 40년간 했다. 그 뿐 아니다.

국익을 우선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줄기차게 비판하고, 그 정책에 희생 당한 대중을 위한 저술과 시위에 앞장 섰다.

촘스키는 최근 새삼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9.11 테러 직후 수 많은 언론이 그의 견해를 궁금해 하며 인터뷰를 가졌고, 이 인터뷰를 모은 ‘9.11’이라는 책이 5월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른 것이다.

운동가로서의 촘스키를 과소 평가했던 주류 언론이 그를 다시 돌아보고 있다.

보스턴시 캠브리지 지역 헤이워드 스트리트 55번지에 있는 연구실에서 이 당대의 석학을 만나 9.11 테러를 비롯한 사회와 역사 속에서 지식인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를 들어보았다.

- 저서가 베스트 셀러에 올랐습니다.

“9.11사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9.11은 복잡해 보이지만 정직한 눈으로 관찰하면 단순해집니다.

미국은 과거 중동 지역에서 테러리즘을 조장해 왔고, 오사마 빈 라덴은 테러를 사적으로 실행한 것입니다.

미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스라엘을 편들고 팔레스타인에 위험한 정책과 힘을 펴왔습니다.”

사진에서 보아왔던 깡마른 외모와 달리 다소 살이 붙은 올해 73세의 그는 베트남 반전운동을 펴오던 60년대부터 미국의 지나친 힘을 비판해온 바 있다.

-9.11 이후 미 국민 사이에 일어난 애국심은 지나치지 않습니까. 테러 응징을 지지했고 아직도 성조기가 거리 곳곳에 나부끼고 ….

“어느 정도의 애국심 발로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상기할 것은 많은 미국인이 아프간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원조를 받고있는 콜롬비아에서조차 전쟁 지지율은 4%뿐이었습니다. 전쟁을 적극 지지한 나라는 이스라엘과 인도뿐입니다.

일부 지식인과 언론이 미 국민은 뭉쳐야 한다며 맹목적 애국심을 조장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나, 애국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 법입니다.”

-한국 같은 작은 나라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민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발언이 나왔을 때 한국의 지식인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럴 때 작은 나라의 지식인들이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요.

“부시는 아마 그 단어의 뜻도 몰랐을 겁니다. 이란과 이라크는 20년간 서로 전쟁을 했는데 무슨 ‘축’을 이룹니까. 우스꽝스러운 문구였습니다.

그러나 떠들썩한 반향이 일어났지요. 가상의 적 설정으로 국제사회는 미국의 힘을 다시 되돌아보고, 미 국내에서는 애국심이 고취되었습니다. 미국이 공격목표로 설정하고 싶어하는 곳은 분명 이슬람 세계입니다.

그러나 느낌을 희석하기 위해 비 이슬람 국가이며 그 누구도 편들지 않고 결코 좋은 나라라 할 수 없는 북한을 집어넣은 것이지요.

작은 나라가, 그곳의 지식인이 옳지 않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홀로 대처할 방법은 달리 없습니다. 국제적 연대가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햇볕정책은 많은 유럽인과 미국인에게서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니 햇볕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연대를 더 이끌어 내고 굳건히 해야 할 것입니다.”

- 촘스키 교수를 흔히 좌파 지식인이라고 규정하는데 느낌이 어떠십니까.

“좌파로 불리는 데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좌파란 정치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하려는 생각을 가진 비관변적인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 그러나 북한과 대치한 한국에서는 좌파를 위험한 사람들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좌파란 용어는 미국에서는 더 이상 그런 의미로 통용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뉴욕 타임스 지와 케네디 상원의원을 좌파라 불러왔습니다. 유럽에서는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를 가리키지 않습니까.”

- 무엇으로 불리든 오늘날 지식인은 사회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나 자신은 지식인이 학문 외부 문제에 대해서도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은 공식적인 학설에 순응하기 쉽고 정치권력의 의견을 좇는 함정에 빠지기 쉽지만 연구할 가치, 논평할 가지가 있는 주제에 헌신해야 합니다.”

- 선거 때가 되면 정치적 발언을 하는 지식인이 많지 않습니까.

“지식인은 자신의 경력을 높이기 위해 정치적 관심사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촘스키 교수의 연구실은 여느 대학교수의 연구실처럼 겉치레에 무관심하다. 다른 점은 4개의 방으로 연결된 연구실 곳곳에 정치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포스터는 영국의 좌파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대형 포스터다.

포스터 아래 적힌 큰 활자의 문구가 시선을 끈다. “세 가지 열정이 나의 생을 지배해왔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욕구,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하는 인간애에 대한 모색.” 러셀의 열정을 지니며 살겠다는 연구실 주인의 다짐으로 읽힌다.

그 다음은 대형 엽서포스터다. 엽서의 수신주소는 ‘팔레스타인.’ 그러나 “주소 없음. 발신자에게 반신”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유태계인 연구실주인이 팔레스타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자세가 보인다.

촘스키의 친구들은 그를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따뜻하고 친화적이다. 또 내성적이고 조용하다”고 흔히 묘사한다.

그러나 내심 ‘거만한 면모가 어딘가 있는 대 학자, 거친 면을 숨길 수 없는 운동가’를 예상했던 기자는 그의 온화한 미소에 예상을 일단 수정해야 했다.

기자가 녹음기와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자 자신의 책상 위에 놓으라면서 쌓인 책을 치워주었을 때, 가방 속에서 삐어져 나온 ‘9.11’ 책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 그 책!”했을 때 기자는 예상을 두 번, 세 번 수정해야 했다.

뒷날 역사학이 운동가로서의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알 수 없지만,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다른 방송기자 일행이 그의 견해를 듣기 위해 대기 중인 것을 보면 언론은 그의 견해를 계속 구하는 중이다. /보스턴에서 글ㆍ사진 박금자 편집위원 par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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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는] 인간 창조성 강조 세계적 언어학자

획일주의.통제 비판…정치적 이견피력 유명

1928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군대징집을 피하기 위해 1013년 미국으로 건너온 아버지 윌리엄도, 어머니 엘지도 히브리어 학자였다.

외신에서는 그를 노동자 계급출신으로 종종 소개하나, 대공황기(1929-30)의 궁핍함, 공식교육을 받지 못한 친척들을 고려할 때 맞는 이야기일 뿐 그는 학자 집안의 아이였던 셈이다.

그가 패자의 편에서 사물을 해석하기를 배운 데는 어린 시절의 고통이 작용했다. 가난한 동네지만 대부분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건너온 카톨릭 신자들인 이웃은 반 유태인 사고로 가득찬 사람들이었다.

유태인을 쫓아내자는 친 나치주의자의 소리가 자주 거리에 퍼졌지만 출근한 부모는 세세한 사정을 몰랐다.

그는 뉴욕의 신문판매대에서 책과 신문을 팔던 삼촌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10살이 넘자, 무정부주의자로 전과경력이 있었던 삼촌은 무정부주의자, 좌파 지식인들이 저술한 책을 보는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시작된 수 많은 독서와 사색은 그를 정치적 이견자로 만들었다.

그가 인생에서 추구해온 분야는 단순화시키면 둘이다. 언어학 연구와 정치적 이견 피력. 60년대 인지과학을 휩쓸었던 행동주의 이론을 그는 65년 생성문법이론으로 뒤엎었다.

인간은 동기와 성향을 가지고 있어 행동예측이 가능하다는 행동주의 이론은 당시 언어습득이론에도 적용되었고 종종 정치권의 국민통제 기도와 맞물렸었다.

그러나 촘스키는 언어습득에 대한 인간의 선천적 능력을 주장하여 인간은 생각이 창조적이며 따라서 때로 자멸적인 행동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미 주류언론은 촘스키 이후의 인지과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연구와 논의의 출발선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또 누가 보아도 그의 이론의 독창성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언어학자로서의 촘스키는 추앙하지만 정치논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고 하여 운동가로서의 촘스키는 외면한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성을 주장하는 그의 언어이론과 획일주의, 여론조작, 통제를 참지 못하는 그의 정치평론은 연결의 고리가 보인다.

■노암 촘스키 약력

1945~55년 미 펜실베니아 대 언어학 학사, 석사, 박사

1958년 프린스턴대 고등연구소 근무

1961년 MIT 언어학부 정교수

1975년 MIT 인스티튜트 프로페서(가장 탁월한 교수에 주어진 영예직)에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