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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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06. 1743호

[수석 졸업자들의 세계] 수석 선배의 조언
‘공부 외적’인성을 개발하라


작년 연말에 우리 회사 영화사업부에서 투자 배급하여 좋은 흥행 성적을 낸 영화의 남자배우, 제작자 등과 술을 한잔 할 기회가 있었다. 극중에서 그 남자배우는 서울대 법대를 나온 벤처사업가 역을 하는데 내 경력에서 힌트를 얻어 남자배우 역을 정하였다고 제작자가 말하곤 했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가자 남자배우는 “사장님이 법대를 졸업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고 조폭 같습니다”라고 멘트하여 폭소가 터졌다. 옆에 있던 제작자는 “야, 사장님이 그냥 법대만 나오신 것이 아니고 들어갈 때 나올 때 다 수석이야”라고 부연설명하자 남자배우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내 생긴 것이나 행동이 공부를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않았겠지라든가, 그런 사람이 법조계에 계속 있지 왜 여기 있느냐라든가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은 이래도 20년 전 학교 다닐 때는 얼굴도 굉장히 샤프했었지”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둘러댔고 덕분에 서로 친해졌다.

서울대 수석이라는 것, 나는 정말 잊어버리고 살려고 해도 남들이 수시로 일깨워주는 경우가 많다. 이번 기고도 내 경력 때문일 것이고, 가끔씩 나와 관련된 기사가 나올 때 또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수석이라는 말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이 말이 따라와야 내가 제대로 소개되는구나 하는 기분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군 제대 후 13년 간 변호사 생활만 하던 내가 갑자기 영화, 음반,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업에 뛰어들어 일을 시작한 후에 수석이라는 것은 사업 동료나 파트너가 될 사람들에게 쉽게 믿음과 신뢰를 주는 경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석이라는 것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다.

사법시험 합격 후 판ㆍ검사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변호사한다고 설치고, 변호사 하면서도 해보지도 않았던 M&A를 한다고 설치고, 이제는 남들이 얘기하는 ‘딴따라’ 사업을 한다고 그 중심부에 들어와 있다.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면서 사는 동안 힘든 인생을 살아가기 위하여는 여러가지 인성(人性)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논리적 사고에 기초한 분석력과 판단력, 신의와 신뢰감, 남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력, 그리고 위로 올라가 조직을 이끄는 장(長)이 될수록 이에 추가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도덕심과 희생정신, 이를 기초로 한 리더십, 미래를 보는 통찰력,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단호한 결단력 등이다. 이런 많은 것들이 합쳐져야 리더로서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 같다.

공부를 잘하였다는 것, 더 나아가 수석을 하였다는 것은 분석력과 판단력의 일부에 대하여는 상당한 보증이 될 수 있을지언정 나머지 인성에 관한 보증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내 짧은 경험이지만 학생 때 공부에 많은 투자를 하여 분석력 등을 길렀듯이 나머지 인성도 상당한 투자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내가 여러가지 경험을 해 보려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다양한 인성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었고, 항상 과거의 것은 잊고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부 잘하는 전문가’ 인식 달라져

지난 몇년 간 사회의 기존 권위가 무너지고 대통령 선거, 새 정부의 인선 등을 보면서 반성도 하지만 또한 심한 자괴감이 들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전문가로서 소양을 쌓아 왔던 많은 사람들이 개혁 성향이 부족하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배척되고 비전문가들로 사회가 구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자라나는 우리 자식들에게 그래도 최소한의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오히려 두렵기도 하다. 물론 옛날부터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그런 계층이 있어야 하고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사회는 변하고 있으니 변화하는 사회에 맞는 새로운 인성과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을까.

나는 요즘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주 고객층인 젊은 세대의 생각을 느껴보고 공감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가끔 내 의견이 10·20대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회사를 운영하면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기쁨 중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부족한 것을 다시 배워나가는 좋은 계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박병무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 사장/서울대 수석 입학·법대 수석 졸업)

△ 1961생 △ 1980년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 △ 1984년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 △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 합격(최연소) △ 1988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 1989년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 석사 △ 1993년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LL.M), 뉴욕주 변호사 △ 1985년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1986~1988년 해군법무관 △ 1989~2000년 김&장법률사무소 변호사 △ 2000~2002년 로커스홀딩스 대표이사 사장 (2002년 4월 로커스홀딩스가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로 개칭) △ 2002년~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사장(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