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성장패러다임의 모색: 정부의 역할 ( 한국경제학회 발표 논문 요약)

1997년의 경제위기를 계기로 산업과 금융 규제를 중심으로한 정부주도 자원배분의 누적된 비효율이 표면화됐다. 이후 경제의 각 부문에서 구조개혁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는 지속적 성장궤도에 새롭게 진입하기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개방과 정보기술의 발달은 한편으로 성장잠재력 향상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제환경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정치 민주화는 하향식 정책결정의 관행을 변화시킴과 동시에 경제정책의 궁극적 목표에서 분배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달라진 환경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운영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가 필요하며 이는 부분적인 개선이 아니라 총체적인 개혁의 차원에서 행해져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진다. 한 마디로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이다.

이 글은 패러다임 전환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정부가 중점적으로 검토해야할 정책과제가 무엇인지를 따지고, 정부의 정책기능을 강화할 방향을 제시한다. 정책의 실패와 정책의 부재는 구분된다. 시장의 실패가 존재하는한 정부의 시장 개입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정부의 실패를 초래한 과거의 정책수단은 경계해야 한다. 나아가 개방화, 정보화, 민주화라는 새로운 경제환경에 대응하려면 보다 효율적인 정책선택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최선의 상태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정책 비전이 완결되지 않는다. 현실적 대안 중에서 최선을 택하는 차선의 원칙하에서 목표설정의 적정성과 수단선택의 적합성을 따져야 한다. 한정된 자원하에서 목표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잡을지, 편익과 비용의 관점에서 무엇이 최선의 수단인지, 기존 시스템의 변화가 정치적으로 가능한지를 체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개방과 민주화 등 경제환경의 변화는 기존의 정부 기능에 많은 제약을 가한다. 생산요소의 국제이동과 이에 따른 조세경쟁은 정부의 세수기반과 전통적인 복지기능을 약화시킨다. 어느 정도 자본 유치에 성공한 경우라도 유입된 자본이 국내에 장기간 머물려 생산적인 산업자본의 역할을 할지 아니면 단기적인 투기자본으로 변모할지에 따라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달라질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의 통합으로 인해 한 시장에서의 충격이 다른 시장으로 빠르게 전파되며 전통적인 거시안정 정책의 실효성이 감소될 것이다. 정치민주화로 인해 정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과정을 통해 내생적으로 결정되고 집행되는 측면이 커졌다. 과거와 같은 고성장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연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증가하기 쉽다. 이처럼 경제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정책수단의 제약이 늘어난 상황에서 정부의 실패를 방지하고 형평하고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려면 과거와는 다른, 창의적인 정책수단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성장은 자본축적과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한다. 과거의 성장 재원은 주로 은행차입을 통해 조달되었고 고부채비율에 따른 위험은 재벌 계열사간의 상호보증 관행과 정부의 명시적 암묵적 보증에 의해 상당부분 해소됐다. 정부가 금융통제를 통해 사업 위험을 분담하는 이러한 차입경영을 대체할 대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의 불확실성이 높고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종국적으로 금융시장의 성숙이 해결책이 되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금융개혁과 기업정책의 청사진이 분명해야 한다. 주식시장이 안정적인 성장재원의 공급원이 도려면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기 필요하며 동시에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여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점을 줄여나가야 한다. 당분간은 기업의 사내유보에 의한 재투자가 투자재원의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며 이는 곧 성장률의 저하를 의미한다. 차입이나 출자의 경우 개별적인 사업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고수익-고위험의 선택은 시장이 평가할 사안이다. 다만 적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위험 선택을 초래할 수 있는 상호지급보증이나 상호출자 관행은 적절히 규제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 정책은 불완전 경쟁에 따르는 비효율, 부당한 내부거래에 따르는 불공정, 그라고 경제력 집중과 총수 중심의 경영체제가 초래할 수 있는 거시 불안을 방지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사업구조나 재무구조와 같은 기본적인 기업활동은 기업의 자율 선택과 시장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 대신 기업집단의 조직이나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확보하여 부당한 내부거래나 불공정한 소수지배가 발생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기업정책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산업자본, 금융자본, 외국자본 간의 삼각관계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은행 민영화, 기업지배구조 및 출자규제 문제, 제2금융권 구조조정 등이 다뤄져야 한다. 요컨대 금융시장이 성숙하고 재원조성과 위험흡수의 메커니즘이 정착돼야 생산적 투자가 지속될 수 있다.

장기적은 성장동력의 핵심은 기술혁신이다. 신기술 분야에 대한 R&D 및 개발된 기술의 확산을 위한 정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선진 기술의 습득을 위해 무역과 국제투자를 적극 활용하는 창의적 정책개발이 필요하다. 해외시장에서의 수출 경쟁은 기존 제품의 시장점유율 유지 뿐아니라 새로운 제품 개발에 대한 유인도 상승시켜 기술혁신을 촉진한다. 수입의 경우도 국내산업 경쟁력 하락의 결과라는 정태적인 관점보다 국내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촉발시키는다는 동태적인 비교우위 창출 노력이 필요하다.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을 촉진시켜 국내 제품의 원가절감이나 품질개선을 이루게 하고 수입 제품에 내재된 기술을 국내 기업이 모방함으로써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유도한다.

외국인투자의 경우 유치 자체가 아니라 국내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도록 정책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생산시설을 구축하는 전통적 형태에 비해 기존 기업을 인수하는 형태의 투자가 증가하고, 선직국에서 개도국으로의 일방적 투자가 아니라 한 나라에서 투자자본의 유입과 유출이 동시에 일어나고, 다국적 계열 기업내의 무역의 급속하게 증가하는 등의 최근 현상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아울러 다국적기업의 투자위치 결정이 단순히 생산비용을 비교하거나 유사한 생산시설을 여러 나라에 걸쳐 설립하는 차원이 아니라 글로벌 전략에 따라 기술개발, 투자, 생산, 판매의 수평적 국제분업을 결정하는 방식이라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직접투자의 신조류와 기업의 국제적 분업 추이를 무시한 종래의 통상전략으로는 해외시장을 공략하기 힘들고 외국인투자의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힘들다.

외국기업과 국내기업을 정책의 차원에서 왜, 어떻게 구분할 지에 대해 논거가 분명해야한다. 기존의 세금 중심 정책으로는 투자유치도 쉽지 않고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투자환경, 투자유인, 개별지원을 기존 제도나 국제관행과 연계해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외국기업을 통한 기술이전의 경우 로열티 지급을 통한 모기업의 기술의 수입보다는 국내 현지 기업이 적극적으로 국내기술개발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또한, M&A형 투자의 경우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국내기업의 경영 합리화를 통해 산업 전반에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오도록 유도해야 한다. 아울러 열악한 국내 투자환경과 산업구조 전환의 증세로 볼 수 있는 제조업의 해외이탈에 일희일비 하지말고 근본 원인부터 생각해야한다. 설비투자의 부진, 외국인투자의 침체, 국내기업의 해외탈출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이 필요하다.

인적자본의 향상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질 부분은 향후 노동력의 증가율과 노동력의 평균 교육 증가율이 낮아질 것이라는 예측과 산업수요에 부응하는 인력을 공급하지 못하는 공교육의 문제점이다. 교육의 개선은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정책에 의해 행해질 가능성이 희박하므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정당성을 갖춘 개혁 추진 체제가 형성돼야 한다. 노동인력의 증가율 둔화에 대한 실효성있는 대응은 여성인력의 이용이며, 기존 노동력의 직업훈련을 통해 인적자원의 질을 높여야 한다. 노사관계의 향상과 노동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 수요와 공급이 직종, 경력의 측면에서 불일치 하는 구조변화를 인식해 다양한 측면에서 발상의 전환을 해야한다. 구조조정은 곧 정리해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종업원을 인적자본으로 생각해 기업 스스로 교육 훈련을 장려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종업원의 이직 능력을 길러 줄 때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은 더 안정될 것이다. 경제사업 분야의 정부 예산도 외부효과는 크지 않으며 정치인의 이해관계만 얽힌 SOC 부분은 식별해 줄이고 인적자원 분야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을 부축이려면 투자와 혁신의 노력에 따르는 다양한 위험을 적절히 흡수해줄 장치가 필요하고 거시 안정과 사회 안정도 확보돼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향후 정부 재정의 위험 흡수 역할이 크게 강조될 필요가 있다. 우선, 금융통제를 통한 정부의 투자 위험 공유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조세 수단을 사용해 기존 기업의 모험적 행위와 신규기업의 진입을 증진시킬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또한 정의 외부효과가 큰 교육이나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정부 지출의 증가가 바람직한데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세수기반이 확대되야 한다. 세수 확보를 위해서는 비효율적인 감면 및 공제제도의 개편도 필요하지만 보다 중요하게 탈세의 근본 원인이 되는 조세정보의 부족을 개선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금융시장의 발달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 금융중개기관이 조세 정보를 정부에 정확하게 보고할 유인, 잠재적 납세자들이 금융기관을 통한 거래를 늘릴 유인을 제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거시경제의 불안은 투자의 불확실성을 높여 생산적인 혁신 활동을 제한한다.
시장개방의 여파로 전통적인 금융정책 수단의 제약이 커짐에 따라 과거 보수적으로 운영되었던 재정정책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커질 것이다. 그러나 정책의 시차, 세수예측 능력의 부족, 추경예산의 관행을 고려할 때 명백한 경기수용의 수준을 넘는 자의적인 재정정책은 오히려 안정을 해칠 수 있다. 당분간 거시 안정을 위한 재정의 역할은 한편으로 예기치 못한 외부충격을 흡수하고 다른 한편으로 공적자금의 재정부담, 복지지출의 증가, 잠재적 통일 비용 등 구조적 재정수요 증가에 대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재정건전성의 악화는 국가신인도의 하락을 초래하기 쉽고 이는 다시 금융시장의 혼란을 부추겨 거시 안정을 해칠 수 있다. 1997년의 위기 때는 민간 부문의 부실을 정부 재정이 쉽게 흡수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대적으로 재정의 사회위험 흡수 능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종국적으로는 세입기반을 강화하고 정부지출의 효율성을 기해야 한다. 세수기반도 취약하고, 자원배분의 효율도 해치며, 세부담도 형평하지 않은 조세제도는 점진적 개선이 아니라 대대적인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한다. 예산제도의 경우,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일반회계의 예산항목 배분이 결정되는 측면이 크다면, 다소의 비효율을 감소하더라도 “benefit pricing”의 성격이 강한 기금이나 특별회계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

민주화가 본격화되고 복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정부지출의 수준과 조세수단의 구성이 정치과정을 통해 내생적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따라서 지나친 분배 악화로 사회갈등이 심화되면 성장잠재력을 저해하는 정책들이 채택되기 쉽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이루게 하려면 복지정책의 우선순위가 조정될 필요가 있다. 우선 조세를 통한 재분배 정책은 실효성이 떨어지는 대안이다. 고소득 인력이나 자본에 대한 과세는 이동성이 떨어지는 생산요소에 전가될 가능성이 높고 어느 정도의 실질적인 과세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에 따른 효율비용이 높다. 조세부담의 ‘수평적 형평성’을 강조하며 세수기반을 넓히는 것이 효율과 형평을 함께 취하는 길이다. 자연 지출 수단을 통한 복지정책의 비중이 커지겠지만 이 과정에서 사회복지의 모든 부문을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고를 버려야 한다. 서구 복지국가의 과거형 제도를 그대로 답습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민간부문에서 시장원리에 의해 사회적 위험을 해소할 수 있는 여지를 찾는 것이 현명하다. 장기적으로는 세전소득분배가 형평하게(악화되지 않게) 되도록 해야 하며 재정정책과 인력정책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복지정책의 틀을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지출 중에서도 교육과 재훈련에 해당하는 항목은 경제전반의 성장잠재력과 저소득계층의 생산성 향상 모두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실업대책도, 사후적인 보험 요소도 필요하지만 사전적으로 재취업이나 이직능력을 증가시켜주는 정책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11/26/03).